여기부터 하동까지 백리 길, 지리산 노고단을 저 멀리 두고 왕시루봉, 형제봉에서 뻗어내린 산자락 아랫도리를 끼고 섬진강을 따라가는 길은 이 세상에 둘이 있기 힘든 아름다운 길”이라고,
유홍준은 그의 책<나의 문화유산답사기3>에 적고 있다. 섬진강에서 노량 바다까지, 하동의 길은 봄에 제일 예쁘다.
화개는 그 크기에 비해 가진 것이 많은 땅이다.
뭍에선 ‘왕의 녹차’로 불리는 야생녹차가 자라고, 짠물과 맞닿은 강에선 손톱보다 작은 재첩이 꼬물댄다. 지리산 물을 더해 수량을 불린 섬진강은 은어와 참게를 살찌운다. 화개의 첫 관문은 화개장터다. 194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5대 시장 중 하나였다던데 지리산 화전민들은 나물을, 구례와 함양 등 내륙지방 사람들은 곡식을, 여수, 광양, 남해, 삼천포, 거제 등지의 사람들은 뱃길을 이용해 수산물을 팔았다고 한다. 하지만 역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으로 시작하는 노래다. 찬바람과 뒤섞인 이른 봄꽃 소식이 얼추 잠잠해질 때쯤 구례와 하동을 잇는 19번 국도변엔 벚꽃이 핀다. 꽃물결은 화개천을 따라 깊숙이 이어진다. 지리산 산그늘이 벗겨지고 봄 햇살이 쏟아지면 잠들었던 꽃봉오리가 톡톡, 빗방울 같은 소리를 내며 연분홍 잎을 연다.
지리산 골골이 흘러내린 화개천의 힘찬 물줄기는 수십 년간 그 자리에 선 굵은 뿌리에 맑고 시원한 생명수를 공급한다. 꽃길은 화개천을 따라 약4km, 십여 리를 이어진다. 길의 이름이 ‘십리벚꽃길’이 된 것도 그러한 까닭이다. 나무는 햇살을 따라 몇 시간 사이에도 쑥쑥 꽃을 피운다. 아침의 벚꽃과 오후의 벚꽃이 다르다. 만개한 꽃은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두툼한 터널을 이룬다. 맑은 날이면 투명한 꽃잎 뒤로 햇살이 반짝인다. 비가 온 날은 또 그런대로 좋다. 사람들은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걷는다. 바람이 불 때마다 꽃비가 내린다. 절정을 지난 꽃잎이 바람을 따라 흩날린다. 불을 밝힌 밤의 벚꽃도 황홀하다. 덜 펴도 좋고, 다 피면 더 좋고, 질 때도 어김없이 좋은 길….
꽃길 끝의 쌍계사는 진감선사 대공탑비(국보 제47호), 대웅전(보물 제500호), 쌍계사 부도(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80호) 등 아홉 점의 보물을 보유한 사찰이다. 쌍계사 근처엔 ‘차 시배지’ 기념비가 있다. 신라 흥덕왕 3년(828) 김대렴이 당나라에서 차나무 씨를 가져와 왕명으로 지리산 줄기에 처음 심었다고 한다. 쌍계사에서 2km 거리에 ‘지리10경’ 중 하나인 불일폭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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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춘리 원부춘마을과 탑리 가탄마을을 잇는 11.4km의 지리산둘레길은 형제봉 임도를 넘어 중촌마을을 지나 정금마을로 올라선다. 이제부턴 지리산 녹차밭 사이를 직접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산을 막 벗어난 이들은 정금마을 차밭에서 입이 떡 벌어진다. 크기 면에선 제주나 보성의 차밭과 견줄 수 없지만 하동의 차밭엔 하동만의 매력이 있다. 4월이면 화개는 찻잎을 따는 손길로 분주하다. 참새의 혀처럼 작은 우전에서부터 세작, 중작, 대작에 이르기까지 잎의 크기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하루 종일 딴 찻잎은 그날 바로 뜨거운 가마솥에 덖어야 한다. 봄이면 집집마다 막 수확한 찻잎의 싱그러운 향기와 구수한 냄새가 끊이질 않는다. 손목이 시큰하도록 덖고 비비고 털고, 그렇게 몇 번의 작업을 거쳐 지리산 덖음차가 완성된다. 황갈색 발효차도 맛있다.
묻지 않아도 화개의 웬만한 집들은 손님이 오면 차를 내온다. “언제 차 한 번 하자”라는 말이 화개에선 괜한 말이 아니다. “녹차는 감기약이지. 산에서 돌배 옇고 댓잎파리 따다 옇고 인동 따다 옇고, 끓이가지고 대려 먹으면 그게 감기약이라.” 차는 음료가 되기도 하고, 약이 되기도 하고, 마을 주민들을 먹여 살리고 자식들을 키운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차밭은 정금마을과 대비마을에서 절정을 이룬다. 종아리에서 허리께로 올라오는 초록의 잎들이 방금 산을 넘어온 이들을 위로하고 있었다. 산을 넘지 않아도 좋다. 차를 타고 올라와 잠시 걸어도 좋을 길이다(2.7km). 꽃길도 녹찻길도 걸을 때라야 몇 곱절 더 좋다. 길이주는 활력과 잎이 주는 풋풋함, 산과 강에서 불어오는 봄바람까지 어울려 그 길 위에 선 것만으로도 활력이 넘친다. 하동의 야생차문화축제는 지난 2월, 제10회 대한민국축제콘텐츠 시상식에서 축제경제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무려 25년간 지속된 축제다. 내년엔 ‘하동세계차엑스포’가 열린다.
2022.03.22 - [분류 전체보기] - 봄이면 떠나야 할 곳 바로 '여기'
섬진강 참게는 자연산이 대부분이다. 녹찻물로 우려 비린 맛을 지워내기도 한다. 화개장터와 터미널 인근의 식당들은 참게탕을 주메뉴로 삼는다. 얼큰한 국물에 고소한 참게살이 어우러져 그 맛이 기가 막히다. 뿌연 국물에 조그만 조개알, 초록의 부추가 가득 들어간 재첩국은 건강식 중의 건강식이다. 김훈의 장편소설 <현의 노래>에는 “흐름을 다한 강이 느리고 순하게 바다와 포개지는 어귀에서 산맥은 멀어지고 물은 넓어져서 멀리 가는 새들이 퍼덕거리는 새로운 천지가 열리는데, 이쌀알만한 조개는 그 어귀의 강바닥을 훑어서 건져올린다.”라고 쓰였다. 수박향이 난다는 은어도 끝내준다. 회로 먹어도 좋고 튀겨 먹어도 맛있다. 지리산 산채정식도 빼놓을 수 없다. 사찰국수, 돌솥밥, 팥죽도 있다. 주로 쌍계사 앞 식당이 맛나다.
이른바 SNS에 올릴 맛집을 찾는다면 거리를 조금 넓힐 필요가 있다. “이런 데 수제버거 집이 있어?” 의심이 들 만큼 한적한 시골 길가에‘고하버거앤카페’가 있다. 양보면 ‘양보제과’도 상황은 비슷하다. 평범한 골목길 안쪽에 자리해 큰길에선 빵집이 있단 사실을 알아채기 힘들 정도다. 악양 특산품인 대봉감으로 와인을 만드는 ‘와이너리카페’도 있다. 넓은 창밖으로 지리산 형제봉 능선과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의 공간적 배경이 된 평사리 무딤이 들판이 보인다. 화개차는 ‘쌍계명차’, ‘다우찻집’ 등에서 마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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